드라마 감상평

성자의 행진: 장애인과 폭력에 대한 넘쳐나는 이야기들

Neo Deus 2010. 10. 29. 14:23

 

성자의 행진: 장애인과 폭력에 대한 넘쳐나는 이야기들

 

오래된 드라마지만 아직까지 그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다.
매우 진지한 드라마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의 문제와 약자에 대한 개별적 사회적 폭력의 문제가 매우 진지하게 또한 섬세하게 이야기 되고 있다.
무거운 주제와 이야기가 있는만큼 드라마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둡다.
그런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절대적으로 선한 주인공의 모습은 어두운 밤 한 가운데 저 멀리 비치는 빛과 같은 따스한 밝음을 전해준다.

 

세칭 지적장애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적장애인들이 일하는 공장은 그들을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받아주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그 속내를 보면 그 지원금을 강탈하고 그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악질의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한 곳에서 그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자원봉사하는 착한 선생님이 있다.
그리고,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세상에 반항하는 여주인공이 있다.

 

겉으로는 불우한 지적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선한 일을 하는 지역 유지인 공장 사장은 부인이 바람나고 사랑조차 받지 못해 지적장애인인 약자를 강제로 추행하는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겉으로 성공하고 남들에게 인정받는듯한 사회 지도층들의 어둡고 구린 뒷 모습이 보이는듯한 설정이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성공한 사람들이 추구해온 방식이라는 것이 도적적으로 올바르게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게 이 사회라는 믿음 하에서 이런 저런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만들어낸 결과적인 부와 명예 아니었던가?
그러한 부와 명예의 뒷 자락에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부도덕한 쓰레기들이 존재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주하기를 싫어한다.
그러한 본능적 거부감은 이러한 부조리와 부도덕한 상황을 보는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청문회를 했다 하면 드러나는 상부계층의 부도덕한 면모들은 더더욱 이 사회에서 도덕성을 버린 사람들이 부와 고위직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부조리를 느끼게 해주기에 더욱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픽션의 세계인 드라마에서라도 올바른 사람이 성공하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이기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나비와 나방은 달라. 사람들은 나방을 보고 기분 나쁘다고 하지"
"나방도 이쁜데.. 나방은 불쌍하다"
그저 조금 다를뿐인데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는 사람인 그들은  마치 나방과 같이 불쌍한 존재인 셈이다.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건 너가 아니야. 그들이야"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건 정신지체인 그들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하지 않고, 사람을 그저 수단으로 대상으로 대해왔던 그들이야말로 사람을 진정으로 만난적도 없고, 진심으로 사람을 만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성공과 지위의 물욕에 휩쌓여 그것의 노예가 된 그들에게는 사람이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폭력에 대한 적나라한 성찰과 표현이 나타난다.
폭력에 대한 혐오가 엿보이는 이 작품에서는 그만큼 악랄한 폭력성이 자주 묘사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원칙주의적일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듯이 아주 작은 폭력도 용납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게 된다.
그 어떤 폭력도 합리화될 수 없다.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세상의 근원적 악은 항상 폭력과 함께 한다.
강함과 약함의 권력적 관계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불러오기 쉬우며 그러한 관계는 사랑과 연대 의식으로 극복해내야 할 부분인 것이다.

 

권력의 불평등에서 발생하는 근원적 폭력에 대한 묘사는 그러한 권력을 경찰, 정치인이라는 권력이 옹호하는 모습의 연출과 다수가 가짜 정의에 기대어 권력을 과용하며 사용하는 폭력에 대한 묘사에 이른다.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다수의 학생들이 정신지체아 두 명을 린치하고 마음껏 모욕을 입히는 폭력의 장면은 바로 잘못을 한 이에게 과도하게 벌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가끔씩 잘못을 한 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공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도 "사랑의 매"라며 자신들의 폭력을 합리화했다.
사랑의 매란 존재하지 않는다.
강자의 약자에 대한 폭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현재의 처벌 제도란 잘못한 이들을 격리하고 교도하는 것이 원칙이지 그들에게 잘못한만큼의 폭력적 응대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다.
우리의 폭력적 사회 분위기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한 약자(이렇게 내몰리는 입장에 선 자는 반드시 약자이다. 강자는 잘못을 해도 이렇게 내몰리지 않는다. 이 사회는 불행히도 그러한 강자의 잘못에는 관용스럽기까지 하다)에게 집단적으로 강한 폭력을 가하려고 한다.
약자에게는 보복의 걱정이 없기에 폭력적으로 극심해질 수 있는 법이다.
폭력적 분위기에 휩쌓일 때는 항상 강자와 약자의 문제에서 약자의 편에 서야한다는 점과 다수편이 가지는 강함을 근거로 발생할 수 있는 집단 마취적 폭력성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정의란 소수자의 권리를 지켜줄 때만 쓸 수 있는 용어다.
이미 다수자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정의라는 말을 쓰기 전에 항상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폭력은 항상 권력적 차등 관계에 존재하는 강압에 숨어 존재한다.
사장이 비폭력적인 공장장에게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폭력을 쓰도록 만드는 행위는 사장이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때보다 훨씬 악랄한 폭력적 행위임을 보여주며 폭력의 근원이 권력의 차등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인간이 어떤 폭력을 견디어 내는 것은 그 폭력보다 더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있을 때이다.
그것은 그 폭력보다 더한 고통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권력적 위압을 보여줌으로 먹힐 수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는 직장에서 짤릴 수 있다는 협박이 가능한 권력자에게서 폭력적 상황은 만들어질 수 있다.
학교에서는 학교를 짤릴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권력자에게서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정신지체인들이 그러한 말도 안 되는 폭력적 상황을 버텨내는 모습에 분통이 터지고, 왜 그것을 벗어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이미 자신의 삶에서도 일종의 비슷한 류의 폭력적 상황을 감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폭력적 상황을 벗어나는 길을 지금 자신이 당하는 폭력이 결코 그저 감내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강고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임을 스스로 정하고 거부를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폭력이라도 견디어낼 수 있는 폭력일지라도 "폭력은 절대 안돼"라고 선언하고 스스로 각인해내지 않으면 폭력은 거부되거나 배제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드라마의 그들처럼 똑같이 부당하게 감내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노지마 신지의 작품 답게 진부하지 않은 스토리가 자연스럽지만 끊임 없이 유동적인 흐름으로 흘러간다.
역시 노지마 신지라고 할만큼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힘에 몰입하게 되고, 중간 중간 나오는 명 대사와 인생에 대한 진지한 메세지들은 우리 마음에 진동하여 울린다.
노지마 신지의 작품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항상 이야기할 꺼리가 넘쳐난다.
그저 한 드라마 감상평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기 위해 덜 적을 뿐이다.

 

2010. 10. 29